티칭백과

티칭백과란?

교과별 특성을 고려한 맞춤형 콘텐츠로서, 스마트한 수업과 자기주도학습을 지원하는 온라인 백과사전 서비스입니다.

지원 서비스
- 주제별 맞춤 지식 공유
- 다양한 스마트 기기 지원
- 멀티미디어 자료 제공
Home > 중등 > 역사 > 역사②

포로 송환 협정

트위터 페이스북 메일 프린트 url복사

6·25 전쟁 중 휴전 협정에서 전쟁 포로 송환 문제가 가장 큰 쟁점이었는데, 1953년 6월 8일, 포로 송환 협정을 맺어 귀국을 원하는 포로는 휴전 후 60일 이내에 송환하기로 하였다.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시작된 휴전 협상은 10월 하순부터 판문점으로 자리를 옮겨 계속되어 2년이 넘도록 끝나지 않았다. 휴전 협상이 시작된 이후 가장 큰 난제는 전쟁 포로 처리 문제였다. 1949년 체결된 ‘전쟁 포로 대우에 관한 제네바 협의’에서는 전쟁 당사국 간의 적대 행위가 끝나는 즉시 포로를 본국에 돌려보내는 ’자동 송환‘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러나 미국 측은 개인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인도주의를 내세워 포로 본인이 남한과 북한을 선택하게 하는 ’자유 송환‘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공산군 측이 제네바 협정 위반이라며 강력히 반발하여 휴전 회담은 중단되고 말았다. 
1951년 12월 18일 포로 처리 문제를 다루기 위해 유엔군과 공산군 양측은 각각 억류하고 있는 포로 명단을 교환하였다. 당시 유엔군은 북한군 96,000명과 중국군 2만여 명 등 132,000명에 이르는 포로 명단을  넘겨주었다. 공산군 측에서는 국군 7,412명, 미군 3,198명 등 총 11,559명의 포로 명단을 내놓았다. 


유엔군이 추산한 인원은 국군 88,000명과 미군 11,500여 명 등 총 10만여 명이었다. 그러나 공산군 측으로부터 넘겨받은 명단에는 불과 11,559명뿐이었다. 공산군 측은 포로가 된 국군들이 자유 의사에 따라 북한군에 재입대한 것이므로 송환 대상이 아니라는 주장을 폈다. 이러한 상황에서 1:1 포로 송환은 불가능하였다.


1952년 초부터 양측은 포로 송환 기본 원칙을 둘러싸고 논란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당시 유엔군 측이 억류하고 있던 공산군 포로 중에는 휴전이 성립되더라도 공산 세계로 되돌아가기를 반대하는 포로가 많았다. 유엔군 측은 휴전 성립과 더불어 송환을 거부한 포로들을 즉시 석방하기로 하되, 되돌아가려는 포로들은 1대 1로 교환한 다음, 그 나머지 포로들은 송환을 희망하는 민간인들과 다시 1대1로 교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공산군 측은 모든 포로들을 전체 대 전체로 한꺼번에 교환하자고 주장하였다. 의견 차이로 협상은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하고 유엔군은 그해 10월 무기한 휴회를 선언하였다.


1952년 12월 3일 유엔 총회에서 인도 정부가 제안한 포로 문제에 대한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그 결의안은 모든 포로의 송환과 석방은 1949년의 제네바 협약에 따라야 하며, 포로 송환을 실시 또는 방해하기 위해 강제력이 사용되어서는 안 되며, 송환을 원하지 않는 포로는 중립 지대에 이송하여 심사한다는 내용이었다. 1953년 3월부터 공산군 측이 유엔 결의안과 유사한 내용을 제안하면서 본회담의 재개에 열의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에 1953년 5월 25일 유엔군 측은 ‘송환을 원하지 않는 포로들은 중립국 위원회에서 심사하여 처리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수정안을 제시하여 공산군 측의 동의를 얻어냈다.

그 결과 1953년 6월 8일 판문점 휴전 회담에서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은 포로 송환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 내용은 첫째, 송환을 바라는 포로는 휴전 후 60일 이내에 송환하며, 둘째, 송환을 바라지 않는 포로는 중립국 송환 위원회에 인계하여 90일 간의 설득 기간을 갖되 그래도 처리되지 못하는 포로는 30일 간의 재유예 기간을 두어 최종 결정을 한다는 것이었다. 



△북으로 송환되는 북한군 포로: 자유의사에 따라 송환을 진행하더라도 약 10만 명 이상의 공산군 포로가 북으로 돌아 갈 것은 확실하였다. 약 10만 이상의 공산군 포로가 송환될 것이 확실하였다.












 


이에 따라 1953년 8월 5일부터 9월 6일 사이에 우선 송환 희망자 96,0000여 명이 판문점에서 송환되고, 송환 거부 포로 22,000여 명은 중립국 송환 위원회에 넘겨져 자유의사에 따라 행선지를 결정하게 하였다. 
이에 1953년 6월 18일 휴전 협정을 반대해 오던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 포로 석방을 단행하였다.


중립국으로 간 포로 문제는 최인훈의 "광장", 한수산의 "시간의 저편" 등 소설과 영화 'JSA'를 통해 재현되었고, 반공 포로 문제는 배창호 감독의 '흑수선'으로 영상화되기도 하였다. 또한 현재까지도 북한에 억류된 한국군 포로의 송환 문제는 이산가족 상봉 때마다 쟁점이 되고 있다. 

확인문제

1953년 6월 8일 포로 송환 협정이 체결되자. 이승만 정부가 단행한 사건은? 

정답 확인하기

더 알아보기

최인훈의 "광장"

명준은 북쪽에 광장이 없었던 것처럼 남쪽에도 삶을 꾸릴 광장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포로가 된 명준은 정전이 되자 제3국을 택하였다. 송환 등록이 시작되었을 무렵 그는 갈팡질팡했었다. 제3국을 택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명준은 그것이 바로 자기를 위해 마련된 조항이라고 생각했다. 믿음 없이 예배하는 것이 고통스럽듯이 신념 없이 정치의 광장에 서는 것도 두렵다.

북과 남 양측의 설득자들은 서로 제 나라를 택하라고 권유했지만, 명준은 끝내 남한도 북한도 택하지 않았다. 중립국으로 가는 인도 선박 타고르 호에 올라탔고, 평소 익힌 영어 덕으로 통역 일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동안에 친해진 선장과 스스럼없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이명준은 제3국을 향해 가는 배의 갑판 위에서 바다 위를 나는 두마리의 갈매기를 보게되며 심한 고독을 느꼈다. 그는 바다를 푸른 광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밤 명준이 탄 배에 한 명의 실종자가 생겼다. 그 실종자는 '미스터 리' 라고 하였다.     -"광장" 중에서-

여기에서 말하는 '밀실'이란 "자신만의 내밀한 삶의 공간"을 말하며, '광장'이란 "사회적 삶의 공간"을 말한다. 남(자본주의)이든 북(공산주의)이든 주인공 이명준에게 열린 길은 없었다. 어디로 갈 것인가? 이명준은 남과 북 어느 쪽도 진정한 인간의 삶을 충족시키기는 어렵다는 것을 판단하고, 제3국의 길을 택하였지만 그것은 추상적일 뿐 현실적일 수는 없었다. 그에게는 지구상에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양대 이념을 넘어 설 수 있는 제3의 이념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전쟁이란 광장을 거쳐서 아무도 자신을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밀실인 중립국을 택하지만 그에게는 바다가 그만의 광장인 동시에 밀실이었던 것이다.


참고자료

관련용어

지식나눔

관련된 나의 지식을 등록하여 공유할 수 있습니다.

의견나눔

0개의 의견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