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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창의 난(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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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 전반 웅천주(충남 공주) 도독 김헌창이 왕위 계승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였다.

김헌창의 아버지는 무열왕계의 진골 귀족인 김주원으로, 선덕왕 대에 가장 유력한 차기 왕위 계승자로 내정되어 있었다. 선덕왕이 죽고 아들이 없으므로 군신들은 곧 후사를 논의하여 김주원을 세우려 하였다. 그때 마침 큰 비가 와서 알천의 물이 불어 김주원이 즉시 알천을 건너올 수가 없어, 김주원 대신 상대등 김경신(원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에 김주원은 명주 지방으로 물러났다. 


김주원이 명주로 물러난 뒤, 계속 원성왕의 후손들이 왕위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김헌창은 중앙에서 지속적으로 활약하였다. 807년 애장왕 때에는 시중이 되어 당시 원성왕의 후손인 상대등 김언승(헌덕왕)에 버금가는 실력자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김언승이 애장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르자, 이듬해 시중 직에서 밀려났다. 그 뒤 계속 헌덕왕파의 견제를 받아 813년(헌덕왕 5)에는 무진주(전남 광주), 청주(경도 진주)의 도독이 되어 지방으로 가게 되었고, 821년에는 웅천주 도독으로 전보되었다.


김헌창은 아버지가 원성왕에게 밀려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있다가, 원성왕의 손자인 헌덕왕 시기에 웅천주(공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822). 반란 세력은 국호를 장안, 연호를 경운이라 하면서 한때 기세를 떨쳤다. 그러나 중앙에서 파견된 토벌군에게 중요 거점인 웅진성이 함락되고 김헌창이 자결함으로써 한 달이 못 되어 진압되었다.


김헌창의 난으로 무열왕계 귀족들은 크게 몰락하였다. 반란에 가담한 많은 귀족이 죽임을 당했고, 사형을 면했더라도 골품제에서 신분이 강등되거나 토지 등의 경제적 기반을 몰수당하고, 중앙 정계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김헌창의 아들 범문은 당시 토벌군의 진압 과정에서 피신해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3년 뒤인 825년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다. 이로써 무열왕계 후손들은 왕위 계승 쟁탈전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확인문제

아버지인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웅천주에서 난을 일으킨 인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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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의 난(846) 

장보고는 흥덕왕 때 당에서 돌아와 해적을 소탕하고 해상 무역을 주도하였다. 이후 장보고는 중앙 귀족의 왕위 쟁탈전에 가담하여 신무왕을 즉위하게 하였다. 그러나 딸을 문성왕의 비로 삼으려다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청해진의 사병을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서 846년 봄에 청해진에서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자객 염장에게 살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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