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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1 (김형종) 09개정
HOME 자유학년 · 창체 오늘의 역사

오늘의 역사

달력 속에서 만나는 역사 속 오늘! 달력을 넘기면서 지나간 시대의 인물과 사건을 만나는 시간 여행을 합니다.

앤디 워홀 (Andy Warhol )

1928~1987 미국 팝아트의 선구자. 영화, 광고, 디자인 등의 시각예술 전반에서 활발히 활동한 현대 미술의 아이콘.

‘앤드루 워홀라’라는 본명으로 미국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의 가난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피츠버그 카네기 공과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였고, 졸업 후 뉴욕으로 이주하여 삽화가, 광고가 등 상업미술가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60년 순수미술로 전환하여 배트맨, 딕 트레이시, 슈퍼맨 등 연재만화의 인물시리즈를 그렸다. 1962년 5월에는 로스앤젤레스에서 그의 첫 전시를 개최하였는데, 이때 32개의 캔버스로 만들어진 캠벨 수프 깡통 작업을 전시하였다. 그해 엄청난 돌풍을 일으키며 팝아트의 대변인이 되었다.

 

워홀은 수프 깡통이나 코카콜라 병, 달러지폐, 유명인의 초상화 등을 실크스크린 판화기법으로 제작하였다. 그가 선택한 작품 주제는 대중잡지의 표지나 슈퍼마켓의 진열대 위에 있는 것으로 그는 이것들을 그의 스튜디오인 '팩토리(The Factory)'에서 대량 생산하였다. 뉴욕 맨해튼의 231번지 이스트 47번가에 문을 연 이 스튜디오는 미술가, 음악가, 배우 등을 비롯하여 사회부적응자와 같은 이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워홀은 이곳에서 다수의 타인, 즉 그의 조수들의 힘을 빌어 작품을 제작하였다. 실크스크린 외에도 워홀은 1963년에서 1968년에 걸쳐 60여 편의 영화를 제작했는데, ‘첼시의 소녀들’(1966)과 ‘나의 허슬러’(1965) 등이 유명하다. 또, 워홀은 1969년 미디어와 오락문화에 관한 잡지 ‘인터뷰’를 공동으로 창립하기도 하였다.

 

1968년 6월, 팩토리의 직원이자 열렬한 여성운동가였던 발레리 솔라나스에게 총상을 입어 거의 죽을 뻔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총알이 워홀의 폐, 위, 간, 식도를 관통하였으나 극적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사고 이후 죽을 때까지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후유증으로 심하게 고생하였다.

 

1970년대부터 사교계나 정치계 인물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하였고, 1983년에는 장 미셸 바스키아와 친분을 맺고 함께 작업하기도 하였다. 그는 1987년 레닌의 초상화를 마지막으로 58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워홀의 시신은 피츠버그의 성 세례 요한 가톨릭 공동묘지에 묻혔으며, 피츠버그 시내 근처의 노스 쇼어 지역에 앤디 워홀 미술관이 건립되었다. 이 미술관은 개인 예술가 전문 미술관으로서는 미국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워홀은 살아있는 동안 이미 현대 미술의 아이콘이었으며, 대중미술과 순수미술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로 오늘날에도 그 명성을 거듭하고 있다.

 

주요 작품에는 ‘캠벨 수프 Campbell's soup’(1962), ‘두 개의 매릴린 The two Marilyns’(1962), ‘재키 Jackie’(1964), ‘마오 Mao’(1973), ‘자화상 Self-Portrait’(198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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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인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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