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교과 설정

마이허브 > 교과에도 반영 됩니다.

  • 국어
  • 영어
  • 수학
  • 과학
  • 사회
  • 지리
  • 역사
  • 도덕
  • 기술·가정
  • 정보
  • 음악
  • 미술
  • 체육
  • 연극
  • 한문
닫기
닫기

사이트맵

닫기

중등

  • 역사 1 (김형종) 09개정
HOME 자유학기 · 창체 오늘의 역사

오늘의 역사

달력 속에서 만나는 역사 속 오늘! 달력을 넘기면서 지나간 시대의 인물과 사건을 만나는 시간 여행을 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 (Marie Antoinette; 1755. 11. 2. ~ 1793. 10. 16. )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와 오스트리아 제국여제 마리아 테레지아 사이에서 막내 딸로 태어났다.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의 동맹을 위해 루이 16세와 정략 결혼을 하였으나, 왕비로 재위하는 동안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루이 16세의 뒤를 이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란츠 1세와 오스트리아 제국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 사이에서 막내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자유분방하게 성장한 그녀는 모국어인 독일어를 비롯하여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 등 외국어와 음악, 춤 등을 배웠다. 하지만 프랑스어를 익히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어 훗날 프랑스의 왕비가 되어 생활하는 동안 공식 문서의 철자 맞춤법도 틀리는 경우가 많아 여러 번 지적되곤 하였다. 오스트리아의 예술적 풍토에서 자란 그녀는 음악과 미술을 좋아하였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의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랜 숙적이었던 프랑스와의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를 루이 15세의 손자 오귀스트와 정략 결혼시키려 하였다. 프랑스 역시 프로이센을 견제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협력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1770년 5월 16일 마리 앙투아네트는 14살의 나이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루이 오귀스트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1774년 루이 15세가 병으로 서거함으로써 남편이 루이 16세로 즉위하자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그녀는 왕비가 된 후, 프랑스 왕실에서 적국 출신이라는 곱지 않은 시선에서 오는 소외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사치나 도박, 유흥으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이 있었다당시 귀족 사교계 전체에 이런 분위기가 만연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베르사유 한 구석에 있는 프티 트리아농(첫딸 출산 후 남편이 선물한 별장)에서 파티나 가면무도회를 열기도 하고, 시골처럼 꾸며 놓고 전원 생활을 즐기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프티 트리아농을 전원적인 분위기로 개조한 후 호화 별장 개조로 소문이 나버렸다. 그녀는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아이를 낳고 나서는 철이 들어서 유흥도 그만두었고, 왕비로서의 위치를 자각하여 왕실에 대한 지지를 회복하려는 노력도 하였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맏딸 마리 테레즈, 루이 샤를(루이 17세)


 당시 왕족과 귀족들은 화려한 로코코 문화에 물들어 있어 무절제한 사치를 하였고. 루이 16세 재위 무렵에는 왕실의 재정 상태가 좋지 않았다. 특히 프랑스의 재정 악화는 전 세대의 왕들이 줄기차게 벌인 전쟁들, 특히 미국 독립전쟁에서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을 지원한 막대한 재정 지출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녀는 프랑스의 다른 왕비들돠 비교하면 그녀가 오히려 수수한 편이었지만, 이미 그녀의 퇴폐적인 사교 생활에 대한 관심으로 들끓었고, 이때 형성된 여론은 두고두고 족쇄처럼 그녀를 따라다니게 되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1785년 목걸이 사건 스캔들이 발생하며 그녀에 대한 민중의 불신과 증오는 더욱 가중되었다. 


식료품 가격 폭등, 거듭된 자연 재해, 국가 재정 파탄으로 사회 불안과 불만이 고조된 프랑스는 1789년 7월 14일 파리 시민들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을 도화선으로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였다. 국왕 일가는 망명을 하려다 혁명군에 발각되어 파리로 끌려와 혁명군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바렌 도피 사건). 1792년, 프랑스 혁명 전쟁이 발발하였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적군에게 프랑스군의 작전을 몰래 알려주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에 파리 시민과 의용군은 튈르리 궁전을 습격하여 국왕 일가를 탕플탑에 모두 유폐시켰다.


1793년 1월 21일, 혁명 재판은 루이 16세에게 사형 판결을 내려 단두대로 참수형에 처하였다. 그해 8월 1일 마리 앙투아네트는 콩세르쥬리 감옥으로 이감된 뒤, 10월 초에 공개 재판을 받았고, 1793년 10월 15일 그녀는 혁명 재판으로부터 사형 판결을 받았다. 처형일 당일 마리 앙투아네트는 거름통을 싣는 짐수레에 실려 처형장으로 끌려갔다. 콩세르쥬리 감옥에서 나올 때 그녀는 머리카락이 짧게 잘려 있었으며 두 손은 뒤로 묶여져 있었다. 결국 1793년10월 16일, 마리 앙투아네트는 38세로 콩코드 광장에서 루이 16세의 뒤를 따라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평가가 매우 극도로 부정적이었으나, 최근의 연구들에 따르면, 당대 퍼져 있던 그녀에 대한 평판의 대부분이 과장된 것으로 부정되고 있는 편이다. 왕정 시대 프랑스의 왕비로서는 특별히 부적합한 행동이 없었다는 평가가 주류를 잇고 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당시 왕비들은 거의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적 능력을 이유로 마리 앙투아네트를 폄하하는 것 역시 지나치다고 보고 있다.

28
29
30
21

금주의 인물 사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