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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신문 皇城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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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제국기에 발간된 일간 신문의 하나이다. 1898년 ‘대한황성신문’의 판권을 인수하여 창간한 것으로 애국적, 계몽적인 글을 많이 실었고 국한문’으로 발행하였다. 1905년에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사장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실어 정간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1910년에 폐간되었다.



황성신문은 1898년(광무 2년) 9월 5일 창간되었다. 남궁 억, 장지연, 박은식 등이 주 2 회 간행하던 대한황성신문을 물려받아 이름을 ‘황성신문’으로 바꾸고 매일 발행하였다. 창간사를 통해 한문을 이해하는 특권층만 대상으로 하지 않고 국한문을 써서 일반 대중의 지식 계발을 꾀하려 한다고 밝혔다. 그래서 당대 독자들은 한글 전용의 ‘제국신문’을 '암(雌)신문', 한문을 섞어 쓰는 ‘황성신문’을 '수(雄)신문'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 황성신문(*)

 

황성신문은 타블로이드판 전체 4면으로, 1면은 논설, 2면은 국내외 기사 및 잡보, 3~4면은 광고로 구성되어 광고가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였다. 1900년 8월 8일 일본과 러시아가 조선을 분할·점령하고자 논의하였다는 내용을 다룬 ‘청자(請者)나 절자(絶者)나’라는 논설 때문에 남궁 억이 구속되었는데 이는 정치 문제로 법적 판결을 받은 최초의 필화 사건이었다.


황성신문은 주식 500을 발행하여 창간한 합작 회사로 경영되었으나, 당시 신문사 수입의 주류인 구독료가 걷히지 않자, 1902년 8월 31일 찬조자 5명을 추가하고 주식 300을 더 발행하였다. 이때 사원 총회에서 장지연을 2대 사장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황성신문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심각한 경영난으로 휴간과 발행을 반복하였다. 1904년 또다시 휴간하게 되자, 고종이 훈령을 내려 신문값 납부를 촉구하는 한편 보신각 근처에 있는 관청 건물을 하사하고 보조금을 지원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1월 20일자 사설란에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제목으로 나라를 팔아먹는 악정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 글로 장지연은 70여 일 간 구류되고 황성신문도 80여 일 간 정지당했다가, 1906년 2월 12일 신문이 속간되었으나 장지연은 사장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어 여러 명의 사장이 취임하였다.

 

황성신문의 편집진은 박은식, 장지연, 신채호 등이었다. 황성신문은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일제가 '대한'이나 '황성'과 같은 단어를 못 쓰게 하자 ‘한성신문’‘으로 바꾸었다가 1개월도 안 된 9월 15일 제3470호로 폐간되었다. ’제국신문‘과 함께 한말의 대표적인 민족 신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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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진은 e뮤지엄(http://www.emuseum.go.kr)에서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제공합니다.

확인문제

을사늑약 체결 당시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게재하여 민족의 울분을 나타낸 신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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