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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융희 4) 대한 제국이 일본과 강제로 맺은 조약으로, 대한 제국의 통치권을 일본에 넘겨주고 합병을 수락한다는 내용이다. 조약의 공포는 8월 29일에 이루어져 대한 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흔히 국권 피탈, 경술국치 등으로도 부른다.
을사늑약으로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내정을 장악한 일본은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이어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일본인이 각 부의 차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일본인 통감이 사실상 대한 제국의 내정을 장악하였다. 이후 일본은 재정이 어렵다는 구실로 대한 제국의 군대를 해산시켰고 사법권과 경찰권마저 빼앗아 군사, 행정, 사법, 치안 등 모든 분야의 지배권을 장악해 나갔다.
거칠 것 없이 국권을 강탈해 가던 일제를 막아선 것은 우리 민족의 의병 항쟁과 계몽 운동이었다. 특히 의병 항쟁은 일제에게 큰 위기감을 주었다. 이에 일제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의병을 탄압하는 한편, 신문지법과 보안법을 만들어 언론·출판의 자유를 금지하고 집회와 결사를 막았다. 이러한 일제의 탄압에 맞서 우리 민족은 줄기찬 항쟁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일부 친일 인사와 단체들은 오히려 나라와 민족을 일제에 넘기기에 힘썼다. 특히 송병준, 이용구 등은 친일 단체인 일진회를 만들어 일본의 지시에 따르고 막대한 비밀 자금을 받아 매국 활동에 앞장섰다. 일본은 병합의 방침을 1909년 7월 6일 내각 회의에서 이미 확정해 놓고 있던 상태였다. 다만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국제적 명분을 얻는 일만 남겨두었다.
일본은 대한 제국을 완전히 병합하기 위해 친일 단체인 일진회를 앞세워 나라를 일본에 합치자는 청원서를 제출하게 하였다. 이는 한국인의 여론을 왜곡하여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지배를 인정받으려는 술책에서 나온 것이었다. 일진회의 합방론은 거센 반발과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일제는 격렬하게 전개된 우리 민족의 반일 항쟁을 철저하게 탄압하였다.
△ 경복궁 근정전 앞에 내걸린 일장기(1910. 8. 29.)
마침내 일본 군대가 서울 곳곳에 배치된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1910년 8월 22일 총리 대신 이완용과 통감 데라우치 사이에 이른바 한·일 병합 조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8월 29일에 공포되었다. 이 조약의 서문에는 두 나라의 행복과 동양 평화를 위해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다고 쓰여 있지만, 사실은 무력을 앞세워 이루어진 침탈이었다. 이로써 대한 제국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조약 체결에 찬성, 협조하였던 대신들은 이후 공을 인정받아 일제로부터 작위를 수여받았다.
나라를 일본에 합치자는 한·일 병합 조약에 앞장선 친일 단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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