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칭백과

티칭백과란?

교과별 특성을 고려한 맞춤형 콘텐츠로서, 스마트한 수업과 자기주도학습을 지원하는 온라인 백과사전 서비스입니다.

지원 서비스
- 주제별 맞춤 지식 공유
- 다양한 스마트 기기 지원
- 멀티미디어 자료 제공
Home > 중등 > 역사 > 역사①

을사의 변 乙巳 - 變

트위터 페이스북 메일 프린트 url복사

당에 유학하고 돌아온 유학승과 유학생 들도 가세한 을사의 변을 계기로 일본에서는‘다이카 개신’이라는 개혁이 추진되었다. 다이카 개신은 중국의 율령 체제를 모방하여 토지와 인민(백성)을 국가가 직접 다스리는 중앙 집권 체제를 만들기 위해 단행한 정치 개혁이었다.

그림 해설 을사의 변(乙巳の變 )
사진 촬영 2005. 7. 31.(original upload date)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645년 여름, 궁궐의 태극전은 국서를 전달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한 백제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몰려든 귀족들로 활기가 넘쳤다. 국서에는 당의 고구려 침략에 따른 위기 상황에 백제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한 대책이 적혀 있었다. 백제 사신을 접대하는 자리에는 덴노와 여러 황자, 소가 씨 집안의 이루카를 비롯한 고위 관리들이 모두 참석했다.

 

사신이 국서를 읽기 시작하자 나카노오에 황자는 궁궐의 모든 문을 닫으라고 명령했다. 소가 씨의 측근들 중 한 사람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국서가 낭독되고 있을 때, 사람들 틈에서 나카노오에 황자가 뛰쳐나와 이루카를 향해 검을 내려쳤다. 이루카는 손쓸 틈도 없이 단칼에 쓰러졌다.

 

이날의 거사는 나카노오에 황자와 호족 가마타리가 주도했지만, 사실 그들을 뒷받침한 세력은 당에 다녀온 유학생과 유학승 들이었다. 황제 중심의 국가 중국에서 유가사상과 법가사상을 익히고 돌아온 그들은 소가 씨 중심의 귀족 정치를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해 왔다. 이루카의 죽음 이후, 소가 씨는 몰락했고 권력은 다시 덴노(천황)에게로 돌아갔다. 

-출처: "처음 읽는 일본사", 전국역사교사모임 지음, 휴머니스트-

  • 관련교과서 : 고등학교 세계사
확인문제

645년, 일본은 이 사건을 계기로 천황(덴노) 중심의 중앙 집권적 율령 국가 체제를 수립하였다. 밑줄 친 내용에 해당하는 사건을 쓰시오.

정답 확인하기

더 알아보기

<을사의 변의 배경>
소가 씨는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 - 우마코(馬子) - 에미시(蝦夷) - 이루카의 4대에 걸쳐 정권을 장악했다. 나카토미노 가마타리(中臣鎌足, 훗날의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이러한 소가 씨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중국의 중앙 집권 체제와 같은 군주, 즉 오키미케(大王家, 일본 황실)로 권력을 되돌리고자 가루노 미코(훗날의 고토쿠 오키미)에게 접촉했으나, 그의 기량이 부족함을 알고 그만두고 나카노오에 미코(황자)에게 접근하였다. 함께 견수사 출신의 미나부치노 쇼안(南淵請安)에게 학문을 익히고 소가 씨 타도의 계획을 구상하게 되었다. 나카노오에 미코는 같은 소가 씨족임에도 에미시·이루카 부자에게 비판적이었던 소가노 구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蘇我倉山田石川麻呂, 소가노 이시카와마로)의 딸과 결혼하고 사에키노 고마로(佐伯子麻呂), 가쓰시로노 와카이누카이노 쓰나다(葛城稚犬養網田) 등을 끌어들였다.

 

운명의 날! 고교쿠 오키미(皇極大王) 4년(645년) 6월 12일, 아스카의 이타부키 궁(板蓋宮)에서 나카노오에와 가마타리 등이 소가노 이루카를 참살하는 쿠데타를 결행하고, 다음날 소가노 에미시까지 자신의 저택에 불을 질러 자결케 함으로써 소가 씨족 중심의 정치체제는 막을 내렸다. 이것을 사건이 일어난 해의 간지를 따라 ‘을사의 변’이라고 부른다.

참고자료

관련용어

지식나눔

관련된 나의 지식을 등록하여 공유할 수 있습니다.

의견나눔

0개의 의견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