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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특사 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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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조약(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외교권까지 강탈당하자, 고종 황제는 조약의 무효와 부당성을 국제 사회에 알리고자 하였다. 이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 평화 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일본의 방해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러·일 전쟁 승리 후 미국, 영국, 러시아로부터 한국에 대한 독점 지배를 인정받은 일본은 1905년 한국을 보호국화하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고종 황제와 일부 대신이 강력히 반대하였으나, 일본은 이완용 등 을사5적을 앞세워 조약 성립을 일방적으로 공포하였다. 이 조약은 조선의 재정과 외교의 실권을 박탈하는 것으로 실제적으로 조선의 국권을 일제에 귀속한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고종 황제는 조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열강의 지원을 얻기 위한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미국에 지원을 호소하였지만, 이미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한 미국으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7년 고종 황제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 평화 회의가 26개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다는 정보를 얻었다. 


이에 고종 황제는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평리원 검사 이준, 전 러시아 공사관 서기 이위종을 만국 평화 회의에 파견하여 일제의 침략성과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폭로함으로써 열강의 동정과 후원을 얻어 국권을 찾고자 하였다.
고종 황제는 평소 눈여겨보고 있던 평의원 검사 이준을 은밀히 불러 특사로서의 임무를 부여하였다. 이준은 평의원 검사 시절 친일 행위를 한 상사를 고발해 면직을 당하였다. 그 강직함과 애국심, 그리고 검사로서 보여준 뛰어난 법리 해석이 특사로서의 자격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다고 고종 황제는 판단하였다.

 

고종의 밀명을 받은 이준은 1907년 4월 22일 극비리에 서울을 출발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을 만났다. 당시 이상설은 을사늑약 이후 북간도 용정으로 망명해 서전서숙을 세워 운영하고 있었으며, 고종 황제의 명을 받아 연해주로 가서 이준과 합류한 것이다. 두 사람은 다시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여 전 러시아 공사 이위종과 합류하였다. 이위종은 러시아 주재 한국 참사관 이범진의 아들로, 을사늑약으로 한국 공사관이 폐쇄된 이후에도 이곳에서 활동하고 있다가 고종의 밀명을 받은 것이다. 이위종은 외교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당시 외교 언어였던 프랑스 어를 비롯하여 러시아 어, 영어에 능통하였다. 


△헤이그 특사(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1907년 6월 25일. 특사들은 헤이그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근처 자그마한 호텔(드용 호텔)에 숙소를 정하고 다음날 태극기를 호텔에 내거는 것으로 특사로서의 외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회의가 열리고 있는 비넨호프 궁전의 리더잘(기사의 회당)을 찾았다. 만국 평화 회의는 특사들이 도착하기 열흘 전에 이미 시작되어 회의가 한창이었다. 이들은 의장인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를 만나 고종 황제의 신임장을 제시하고, 한국의 공식 대표로서 회의에 정식으로 참석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열강들은 을사조약을 정당한 조약으로 인정하고 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 의해 박탈되었음을 인정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영국과 일본의 집요한 방해 공작까지 겹쳐 특사들은 회의에 참석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특사 일행은 회의 참가를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여러 외국어에 능통한 이위종을 필두로 우선 회의장 밖에서 각국 대표들을 만나 청원서를 전달하였다. 한국이 처한 상황과 만국 평화 회의 참석을 요청하는 일종의 호소문이었다. 그 결과 그들의 사정이 각국 신문 기자에게 널리 알려졌다. 특히 국제 협회 회장인 언론인 W. 스테드의 주선으로 국제 협회에 귀빈으로 초대되어 세계의 언론인에게 호소할 기회를 얻었다. 이위종이 프랑스 어로 한 연설이 큰 호응을 받아 연설문 전문이 '한국을 위하여 호소한다.'라는 제목으로 세계 각국에 보도되어 주목을 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국 대표들에게 외면당하여 본회의 참석은 끝내 거부당하였다.

 

참석이 좌절되자, 이준은 울분한 나머지 음식을 끊었고, 그로 말미암아 병이 생겨 1907년 7월 14일 유숙한 호텔에서 병사하였다. 이위종은 국제 협회에서 연설 직후 잠시 러시아로 돌아갔으나, 이준의 순국을 알리는 급전을 받고 18일에 헤이그에 돌아왔다. 이준은 헤이그 외곽의 한 공동묘지에 매장되었고, 그의 유해는 1963년 조국으로 이장되어 수유리 묘소에 안장되었다. 헤이그 외곽 공동묘지에는 아직도 이준의 묘적지가 남아 있다. 이후 이위종과 이상설은 헤이그 특사행 전에 이미 계획된 각국 순방 외교에 나서 한국의 독립과 영세 중립화를 역설하였다.

 

한편, 일제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선위라는 형식을 빌어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켰다. 이를 계기로 7월 24일 차관 정치를 위한 한·일 신협약이 체결되고, 31일에는 군대 해산 명령이 내려졌다. 또한 일제는 1907년 8월, 이 헤이그 특사 사건을 들어 특사를 위칭했다고 하여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완용 내각은 특사들이 참석하지 않은 궐석 재판에서 이상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을 선고함에 따라 이상설과 이위종은 끝내 귀국하지 못하였다. 

확인문제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 파견된 특사 세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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