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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羅蕙錫; 1896~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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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그림, 소설, 희곡, 시 등 다방면에 재능을 지닌 신여성이었다. 여성 해방, 여성의 사회 참여 등을 주장하였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꼽히며, 대표작으로는 ‘자화상’, ‘스페인의 풍경’, ‘파리 풍경’ 등이 있다.

나혜석은 1896년 경기도 수원에서 당시 개화 관료 집안에서 태어나 천재적인 예술가적 자질과 외모를 겸비하여 주목을 받으며, 1913년 진명여자보통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17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였다. 


미술뿐만 아니라 문학에도 소질이 있던 그녀는 유학 시절부터 여성이 각성하여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근대적인 여권 신장에 관한 글을 발표하였고, 1918년 신여성이 주변의 낡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설득해 가는 과정을 담은 단편 소설 ‘경희’를 발표하였다. 1918년 학교 졸업 후 귀국하여 함흥의 영생중학교와 서울 정신여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며, 작품 활동을 하였다. 1919년 3·1 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어 5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녀는 1920년 일본 유학 중 만난 김우영과 결혼하였다. 결혼식 전 당시는 파격적으로 신문지상에 자신의 약혼식 발표를 하기도 하였으며, 결혼식 때는 예술 활동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남편에게 받아냈다. 결혼 후 그녀는 화가로서 3남매의 어머니로, 외교관의 아내로서의 모든 역할을 충실히 해 나갔다. 그녀는 남편의 도움으로 1921년 서울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유화 개인전을 가졌는데, 당시 5000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 화제가 되었다. 


그녀는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유화를 출품한 것을 시작으로 1926년 이후 여러 번 입선과 특선을 차지하며 화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1927년 유럽과 미국 시찰을 가게 된 남편을 따라 모스크바를 거쳐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에스파냐 등을 여행하면서 미술관과 박물관을 견학하고, 특히 파리에 8개월가량 머물면서 미술 공부를 하며 야수파, 인상주의, 표현파 등의 영향을 받았다. 


△ 자화상                                                  △ 화령전 작약 

                                             

하지만 파리 체류 시 천도교 지도자 최린과의 만남이 문제가 되어 귀국한 뒤인 1931년 이혼하였다. 그녀는 이혼 뒤에도 작품 활동을 계속하며 독립적인 생활을 시도하였다. 1934년 “삼천리”에 ‘이혼고백서’를 발표하여,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펴며 전통적인 여성관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말년은 비참하였다. 그녀는 사회의 냉대 속에서 오빠와 자식들한테서도 외면당하며,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쓸쓸한 생활을 하면서 심신은 서서히 병들어 갔다.  그녀는 어느 날 양로원을 나선 뒤 종적이 묘연해졌다. 그리고 그녀는 가난 속에 홀로 떠돌다 행려병자로 객사하였다. 1949년 3월 관보에 ‘1948년 12월 10일, 나혜석 추정 행려병자 사망.’ 이라고 전해졌다.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나혜석에 대해 최근 문학계, 미술계, 여성계에서 재조명하고 있으며, 수원시 인계동에는 ‘나혜석 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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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며, 문필가, 여권 운동가로 알려진 신여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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