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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타 회담Yalta Conference; 1945. 2. 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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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2월 4일 1945년 2월 연합국인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이 크림 반도 남단 얄타에 모여 제2차 세계 대전 전후 처리를 논의한 회담이다.

1939년부터 시작된 제2차 세계 대전은 1945년 초부터 연합국의 승리가 확실해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소련의 스탈린 최고인민위원이 1945년 2월 4일 소련의 크림 반도 휴양지 얄타(현재 우크라이나)에서 회담을 가졌다. 회담은 11일까지 8일 동안 계속되었다. 


이 회담에서 연합국 수뇌들은 전쟁이 끝난 후 ‘독일을 분할 점령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연합국은 독일인에 대해 최저 생계를 마련해 주는 것 외에는 일체의 의무를 지지 않는다고 합의하였다. 그리고 독일 이외의 유럽 여러 나라의 처리 문제, 소련의 대일본 전쟁 참여,  전쟁이 끝난 후의 국제 연합의 창설 방안 등 중요한 전략을 논의하였다. 태평양 전쟁에서 고전하고 있던 미국은 소련의 참전 보장을 얻기 위해 많은 양보를 하여 공식 협정과 비밀 협정을 따로 체결하였다. 


한편, 이 회담은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미친 극동 아시아 문제도 포함되었다. 독일이 항복한 뒤,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하고, 그 대가로 러·일 전쟁 당시 잃었던 사할린과 일본의 4개 북방 영토의 반환, 외몽골의 독립 등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소련이 참전한 지 5일 만에 일본이 항복하였다. 

또한 한반도 문제가 구체적으로 다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소련군의 한반도 진주가 허용되었다. 이에 따라 한반도의 미·소 분할 점령과 분단의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결국 얄타 회담은 전후 세계가 공산 진영과 자유 진영의 냉전 체제로 대치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얄타 회담의 연합국 정상들  회담을 마친 연합국 정상들이 리바디아 궁전에서 기념 사진을 찍은 모습이다. 회담을 개최한 리바디아 궁전은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1911년에 여름 별장으로 지은 것이다. 사진의 왼쪽부터 영국의 처칠 수상,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소련의 스탈린 최고인민위원이다.  

 


확인문제

1945년 2월 미·영·소 수뇌들이 모여 패전국에 대한 처리, 소련의 대일 참전 등을 결정한 국제 회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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