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칭백과

티칭백과란?

교과별 특성을 고려한 맞춤형 콘텐츠로서, 스마트한 수업과 자기주도학습을 지원하는 온라인 백과사전 서비스입니다.

지원 서비스
- 주제별 맞춤 지식 공유
- 다양한 스마트 기기 지원
- 멀티미디어 자료 제공
Home > 중등 > 역사 > 역사①

잔 다르크 Sainte Jeanne D'arc; 1412~1431

트위터 페이스북 메일 프린트 url복사

백년 전쟁은 프랑스의 왕위 계승과 영토 문제 등이 원인이 되어 1337년부터 1453년까지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이다. 백년 전쟁 후반기에 신의 계시를 받은 소녀 잔 다르크가 나타나 전쟁을 프랑스의 승리로 이끌었으나, 그녀는 마녀로 몰려 화형을 당하였다.

프랑스 왕위 계승권과 영토 분쟁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 전쟁은 1337년부터 1453년까지 무려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계속되었다. 이 전쟁의 시작은 영국의 플랜태저넷 왕조와 프랑스의 발루아 왕조 사이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 다툼이었다. 또한 필리프 4세 때부터 분쟁거리였던 프랑스 내 잉글랜드 소유의 영토 문제도 원인이었다. 프랑스와 영국의 왕위 계승권과 영토 분쟁은 휴전과 전쟁을 반복하며 계속되었다. 전쟁 초기에는 영국군이 일방적으로 승리하였다.



천사의 계시를 받은 잔다르크

잔 다르크는 1412년 1월 6일 프랑스 북동부 지역의 작은 마을 동레미에서 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가 태어날 당시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백년 전쟁으로 프랑스 전 국토는 폐허가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신앙이 두터웠던 잔 다르크는 16세 때 대천사 미카엘, 성 카테리나, 성 마르가리타로부터 발루아 왕조의 샤를 왕세자를 도와 프랑스에 침범한 잉글랜드군과 그들을 돕는 부르고뉴를 몰아내고 프랑스를 구하라는 천사의 계시를 들었다. 



프랑스의 내분과 백년 전쟁의 양상

 백년 전쟁은 잔 다르크가 나타날 즈음 새로운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종종 정신착란을 증세를 보이는 샤를 6세를 대신하여 국정의 실권을 장악하려고 한 귀족들이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로 나뉘어 내란 상태에 빠졌다.


1413년 헨리 4세의 뒤를 이어 영국 왕으로 즉위한 헨리 5세는 프랑스의 내분을 이용하여 부르고뉴파와 결탁하고, 1415년 노르망디를 침략하여,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패배시켜 북프랑스의 여러 도시를 빼앗았다. 헨리 5세는 이후 스스로 샤를 6세의 딸 카트린과 결혼함으로써 자신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승인시켰다. 
그러나 샤를 왕세자와 이를 지지하는 아르마냐크파는, 영국 측의 강요를 인정하지 않은 채 중남부 프랑스에 거점을 두고 전쟁을 계속하였다. 


1422년 영국의 헨리 5세와 프랑스의 샤를 6세가 잇달아 죽자 나이 어린 헨리 6세가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의 국왕을 자칭하고 나섰고, 프랑스에서는 왕세자가 샤를 7세로서 프랑스의 왕위에 올랐음을 선언하였다. 이에 영국군은 1428년 샤를 7세의 거점인 오를레앙을 포위하였고, 샤를 7세는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잔 다르크의 눈부신 활약

잔 다르크는 자신이 받은 계시를 실천하기 위해 마을을 떠나, 샤를 7세를 접견하고  그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고 프랑스를 구원하겠노라고 맹세하였다. 샤를 7세에게서 받은 군사를 이끌고 전쟁에 나간 잔 다르크는 프랑스군을 거침없이 이끌었다. 잔 다르크의 영웅적인 활약으로 프랑스군은 오를레앙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이후 대부분의 전투에서도 승승장구하였다.

흰 갑주에 흰 옷을 입고 선두에 서서 지휘하는 잔 다르크의 모습만 보고도 영국군은 도망하였다. 
잔 다르크는 랭스까지 진격하였고, 이곳 성당에서 전통적인 전례에 따라 샤를 7세는 정식으로 대관식을 거행하고 프랑스 국왕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마녀로 몰려 화형에 처해진 잔 다르크

샤를 7세는 즉위 후 안이해져, 파리 탈환을 통해 영국군의 완전 축출을 주장하는 잔 다르크의 말을 무시한 채 1년을 보내다 영국군의 재공격을 받았다. 잔 다르크는 다시 한번 왕과 프랑스를 위해 싸웠다. 그러나 잔 다르크는 1430년 5월 콩피에뉴 전투에서 부르고뉴파 군사에게 포로로 사로잡혔고, 이윽고 현상금과 맞바꾸어 영국군에게 넘겨졌다. 잔 다르크는영국과 부르고뉴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일곱 번의 재판 끝에 마녀, 이교도, 우상 숭배의 죄를 뒤집어썼다. 


중세 기독교는 신성한 신의 중계자인 사제를 거치지 않고는 신의 계시를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그녀를 이단으로 몰았다. 결국 잔 다르크는 1431년 5월 30일, 루앙의 비외 마르셰 광장에서 군중이 보는 앞에서 장대에 밧줄로 묶여져 화형을 당하였다. 영국군은 군중이 그 유해를 가져가지 못하도록 시체를 세 번이나 불에 태워서 잿더미로 만든 후에 센 강에 내다 버렸
다.
































화형당하는 잔 다르크 (쥘 외젠 르느뵈 작품)


명예를 회복한 잔 다르크 

샤를 7세는 잔 다르크가 죽은 25년 후1456년에야 그녀의 마녀 혐의를 풀어주고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다.  종교재판소는 잔 다르크에 대한 심사를 재개하여 그녀에게 내린 혐의는 모두 무혐의이며 따라서 무죄라고 최종 판결을 내렸고, 그녀를 순교자로 선언하였다. 잔 다르크는 1909년 복자로 시복되었으며, 1920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1920년에 그녀를 성녀로 시성(諡聖)하였다.


  • 관련교과서 : 금성 299쪽, 비상 287쪽, 미래엔 263쪽, 천재 281쪽, 두산 241쪽
확인문제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벌어진  백년 전쟁은 초반에 영국이 승리하였으나. (              )가 나타난 이후 프랑스가 영국을 물리쳤다. 

정답 확인하기

참고자료

지식나눔

관련된 나의 지식을 등록하여 공유할 수 있습니다.

의견나눔

0개의 의견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