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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 黃玹, 1855. 12. 11.~1910.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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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유교적 지식인이자 문장가로, 호는 매천(梅泉),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피탈되자 비통함을 금치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다 절명시 4편을 남기고 음독 자결하였다. 조선 말기와 한말의 사회상에 대한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그중 대표작인 "매천야록"은 한국 최근세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황현은 1855년(철종 6) 전라남도 광양에서 태어나 구례에서 살았다. 인조반정 이후에 몰락한 장수 황씨 가문은 그가 태어난 시기에 이르면 정계에 유력한 인사를 배출하지 못하고 시골 유생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황현은 11세부터 서당에서 왕석보를 스승으로 하여 시문을 본격적으로 배워 시와 문장에 능통하였다.


1875년(고종 12) 서울에 올라와 이건창에게 시를 추천받아 당시의 문장가이며 명사인 강위, 김택영, 정만조 등과 교유하였다. 특히 이건창, 김택영과는 그후 스승과 친구 사이로 평생 동안 교유하며 지냈다. 황현은 1883년 과거 시험 보거과(保擧科) 초시에서 장원으로 뽑혔으나, 시관이 시골 사람이라 하여 2등으로 내려놓자 복시, 전시를 보지 않고 귀향하였다. 


그 뒤 부친의 뜻에 따라 1888년 성균관 복시에 응시, 장원으로 뽑혀 34세로 성균관 생원이 되었다. 그러나 갑신정변 이후 민씨 정권의 무능과 부패에 환멸을 느끼게 되자, 1890년 다시 귀향하여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전념하였다.

 

황현은 어려서부터 전통적인 유학과 주자학을 공부하였지만,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주자학에 만족하지 못하고 20세 이후 양명학과 실학에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정약용의 학문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면서 그의 재주와 실용을 중시하는 태도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유학자적 지배층적 입장에서 동학 농민 운동을 수습하고 정치를 개혁하려 하였으며, 서양의 기술 문명은 수용하되 유교적 사상은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사실상 국가의 주권이 상실되었다고 보고, 중국 화이난 지방에 있던 김택영을 따라 중국으로 망명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엿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에게 국권을 강탈당하자 통분하여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가 절명시 4편을 남기고, 9월 10일 소주에 다량의 아편을 타서 마시고 자결하였다. 


이듬해 영호남 선비들의 성금으로 "매천집"이 출간되고, 한말 풍운사를 담은 "매천야록"은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 사료 총서 제1권으로 발간되어 우리나라 최근세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그 밖의 저서에  "오하기문(梧下紀聞)""동비기략(東匪記略)" 등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전남 구례 생가터에 영정과 위패를 모시는 사당 매천사와 그의 유품을 전시한 유물관이 있다.


 황현이 자결 직전에 남긴 절명시 4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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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진은 독립기념관에서 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11월의 독립운동가 매천 황현(潢玹) 선생 전시' 보도자료를 이용하였습니다.



확인문제

1910년 일본의 대한제국 강점을 보며  비분강개하다가 절명시와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한 한말 우국지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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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천야록(梅泉野錄)

1864년(고종 1) 흥선 대원군의 집권으로부터 1910년(순종 4) 국권 피탈에 이르기까지의 47년 간의 최근세 역사를 기술한 편년체의 역사책으로, 필사본. 6권 7책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1894년의 동학 농민 운동과 갑오개혁, 청·일 전쟁 등을 경험하면서 유교적 입장에서 비판 의식을 가지고  황현 자신의 견문을 기록한 것이다. 끝 부분인 1910년 8월 29일부터 9월 10일 순절할 때까지는 문인 고용주가 추기(追記)한 것이다.


원본은 권1이 상 ·하 2책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내용은 흥선 대원군의 집권과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의 몰락, 흥선 대원군 집권 10년간의 여러 사건 등 혼란한 정국과 변천하는 사회상 및 내정 ·외교의 중요한 사실을 거의 시대순으로 빠짐 없이 기록하고 있다. 1955년에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한국 사료 총서제1로 간행하면서 황현의 자손들이 작성한 부본(副本)도 실었다.


오하기문(梧下紀聞)

황현이 지은 야사로, 미간행 초고(草稿) 필사본이다. “오하기문(梧下紀聞”이란 그가 사는 집 안에 오동나무가 있었는데 그 아래에서 전해들은 이야기를 적은 글이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현재 전사본(轉寫本) 몇 질이 전하고 있으나, 완질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정리되지 않은 원 사료를 그대로 옮겨 쓴 까닭에 ‘제1필(第一筆)’에서 ‘제7필’까지 내용과 필체가 다른 권차를 편의상 붙여 놓았다.


1895년 4월 1일부터 1907년 12월 30일까지 13년의 기사를 기록하여 “매천야록‘과 내용상 중복되는 부분이 많은데, 그 대본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또한 정사(正史)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참신하고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으며, 관변(官邊)의 이면사를 확인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구체적인 내용은 민담·사건·소문 및 신문 보도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고, 그중에는 원색적인 표현까지 구사해 가며 그 시말을 자세히 기록한 것도 있다. 사건의 날짜나 전후가 맞지 않는 것은 자료나 소식을 접한 순서대로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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