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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톈안먼) 사건 天安門 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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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6월 4일,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며 연좌시위를 벌이던 학생, 노동자, 시민들을 정부가 계엄군을 동원하여 탱크와 장갑차로 진압하면서 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이다.

천안문(톈안먼) 사건은 민주화 시위에 대한 정부의 무력 진압으로 빚어진 사건이지만 중국의 개혁·개방·정책 시행 이후 누적되어온 문제점이 폭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78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이 단행된 이래 중국은 서구의 시장 경제를 부분적으로 도입하고 경제적 자유와 개방의 폭을 넓혀 왔다. 이 시기의 경제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결합된 혼합 경제로, 두 경제 체제의 장점이 합해져 급속한 경제 발전이라는 긍정적 측면이 있었으나, 경기 침체, 인플레이션이라는 부정적 문제들도 나타났다. 여기에 소련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바람이 중국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중국 지도층에는 덩샤오핑을 주축으로 하는 보수파, 후야오방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 진보파로 분열되어 있었다. 1985년 들어서면서 두 세력의 권력다툼이 시작되었고, 1987년 공산당 총서기 후야오방을 강제 퇴임시킴으로써 보수파가 권력을 잡았다. 후야오방 자리에는 자오쯔양이 취임하였고, 보수파와 개혁파의 대립 상황이 계속되는 중에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이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하였다.

 

학생, 지식인 사이에 추앙을 받던 후야오방에 대한 추모를 빌미로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베이징 대학교 학생들이 그를 추모하고 보수파를 비난하는 대자보를 붙이기 시작하고, 4월 17일 베이징 대학교의 학생 수천 명은 톈안먼 광장에 집결하여 후야오방의 재평가를 요구하며 연좌시위에 들어갔다.

4월 22일 후야오방의 장례식에 수십만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참가하였고, 학생들의 자치 조직으로 질서 정연하였으며, 무장 경찰이 있었지만 충돌하지 않았다. 그리고 추도식이 끝나자 학교 단위로 광장을 떠났다. 그러나 후야오방의 장례식 이후 본격적인 민주화 시위가 시작되었다. 시위는 5월 13일 이후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학생들은 공개적으로 덩샤오핑을 비판하고, 그의 퇴진을 주장하여 중국의 권력 투쟁에 개입하였다. 각 학교로 돌아간 학생들은 무기한 동맹 휴학에 들어가고 5월 4일에 전국적인 동맹 휴학을 준비하였다. 또한 5월 중순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의 중국 방문은 개혁·개방을 요구하던 시위대들에게 또 다른 명분을 주었고, 그가 도착한 일정 중에 톈안먼에서는 지식인, 노동자, 일반 시민 등 100만여 명이 연일 모여들어 공산당 일당 독재를 반대하며 민주화를 요구하였다.

당시 총서기 자오쯔양은 
시위대를 방문하고 학생들과 대화하며 “여러분의 요구는 언젠가 받아들여질 것입니다.”라고 개혁의 필요성을 인정해 학생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그러나 당시 그는 이미 당 내부에서 배척된 상태였으며, 이후 사람들은 공개적 장소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결국 자오쯔양은 축출되고, 강경 보수파인 리펑 총리가 정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 학생들의 단식 투쟁(1989. 5. 19.): 공공버스가 천안문 광장에 있는 학생들의 집이 되었다.


덩샤오핑은 5월 19일 고르바초프가 떠나자마자 리펑 총리를 통해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하지만 베이징에 도착한 군인들은 군대 차량을 막고 있는 시민과 학생들 때문에 인민대회당 주위에 몇 시간 정도 주둔하여 있다가 철수하였다. 학생들은 계엄령에 대항하여 시위를 벌였다. ‘덩샤오핑 물러나라! 리팡 물러나라! 5월 하순 천안문 광장에는 학생들의 시위대가 더 늘어났고, 상하이는 물론 선양, 창춘, 창사 등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 교외에 머물러 있는 계엄군 차량: 계엄 부대는 막고나선 시민과 학생들 때문에 베이징 시내에 진입하지 못하고, 200여 대의 계엄군 차량이 베이징 시내에서 20 ㎞ 떨어진 펑타이에 머물러 있었다.

 

 △ 천안문 광장에 세워진 자유의 여신상: 1989년 5월 28일 베이징 중앙미술대 학생들이 자유의 여신상 만들기 작업에 들어가 5월 30일 완성하여 천안문 광장의 마오쩌둥 초상과 마주하여 세워졌다. 

  

1989년 6월 3일 밤 10시 중국 인민 해방군은 베이징 천안문 광장을 뒤덮은 100만 명의 시위대에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탱크와 장갑차까지 동원한 무력 진압은 다음 날 새벽 4시까지 이어졌다. 처참한 ‘피의 일요일’로 불리는 6월 4일 이 사건이 바로 천안문 사건이다. 중국군은 시위대를 무차별 살해함으로써 민주화 시위를 종식시켰다. 중국 정부는 이때 희생된 시위대의 수를 밝히지 않아 정확한 숫자가 알려지지 않았지만, 서방 세계에는 수천~1만 명에 이르는 사망자가 나온 대학살로 보도되었다.

 

이후 중국 정부는 세계 여론의 빗발치는 비난과 경제 제재 조치에도 불구하고, 반대자들에 대한 체포와 숙청을 단행하였다. 중국 내 덩샤오핑의 정치적 입지가 축소되었고, 보수파의 압력으로 덩샤오핑은 권좌에서 물러났으며 개혁·개방 정책들은 하나 둘씩 뒤집혔다. 그리고 정치국원 겸 상하이 시 당서기 장쩌민이 자오쯔양의 뒤를 이어 신임 총서기에 선출됨으로써 장쩌민 정권이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확인문제

1989년 중국의 학생과 시민의 민주화 시위에 정부가 무력으로 진압하여 유혈 사태가  빚어진 사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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