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칭백과

티칭백과란?

교과별 특성을 고려한 맞춤형 콘텐츠로서, 스마트한 수업과 자기주도학습을 지원하는 온라인 백과사전 서비스입니다.

지원 서비스
- 주제별 맞춤 지식 공유
- 다양한 스마트 기기 지원
- 멀티미디어 자료 제공
Home > 중등 > 역사 > 역사②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The Moscow Conference of Foreign Ministers

트위터 페이스북 메일 프린트 url복사

1945년 12월 제2차 세계 대전 전후 문제 처리를 위하여 모스크바에서 개최한 미국, 영국, 소련의 외무 장관 회의이다. 이 회의에서 우리나라에 임시 민주 정부 수립, 이를 준비하기 위한 미·소 공동 위원회를 설치, 미·영·중·소 4개국에 의한 5년간 신탁 통치 실시 등을 결정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 12월 16일부터 27일까지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3국 외무장관 회의가 열렸다. 이는 종전 후 계속된 강대국 간 협의의 연장선에서 열린 것이었다. 이 회의에서 미국은 임시 정부 수립 없이 5년에서 최대 10년 동안 4개국이 신탁 통치하자고 제안하였고, 소련은 임시 정부 수립과 미·공동 위원회 개최, 조선의 정당, 사회 단체의 참여를 제안하였다.

 

미국과 소련은 첨예한 대립을 보였으나 결국 의견을 조율하여 12월 27일 발표하였다. 주요 내용은 민주주의적 원칙 아래 독립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임시 정부를 설치할 것, 임시 정부 수립을 원조하기 위해 미ㆍ소 공동 위원회를 설치할 것, 미ㆍ영ㆍ소ㆍ중은 한국을 최고 5년 동안 신탁 통치할 것, 미ㆍ소 공동 위원회는 임시 정부 수립을 준비하기 위해 민주적 정당ㆍ사회단체와 협의할 것 등이다.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 소식이 국내에 알려지자 김구 등 민족주의 세력을 비롯한 많은 사람은 신탁 통치를 민족의 자주권 부정이라고 여겨 반탁 운동을 벌였다. 특히 우익인 한민당의 입장을 대변하였던 당시 동아일보는 “소련은 신탁 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이라고 보도하여 사회적으로 반탁 운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동아일보의 이러한 보도는 미국과 소련의 입장을 정확히 반대로 보도한 오보였으며, 결정서의 내용을 왜곡한 것이었다.

 

좌익 세력도 처음에는 신탁 통치에 반대하였으나, 나중에 소련 측의 요구에 의해 모스크바 회의의 내용의 전문이 공개된 후, 회의의 결과를 총체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입장에 섰다. 여기서 좌익 계열은 임시 정부 건설 원칙에 강조를 하였으며, 우익 계열은 신탁 통치 반대에 강조하였다. 이러한 우익과 좌익의 입장 차이는 격렬한 대립으로 이어졌다.

---------------------------------------------------------------------------------

* 본 게시물의 그림은 독립기념관에서 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웹툰으로 보는 독립운동사: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용하였습니다.

확인문제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서는 한반도에 임시 민주 정부를 세워 최대 5년간 (                     )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정답 확인하기

참고자료

지식나눔

관련된 나의 지식을 등록하여 공유할 수 있습니다.

의견나눔

0개의 의견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