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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트 칙령Edict of Nan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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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년 4월 13일 프랑스 왕 앙리 4세가 브르타뉴의 낭트에서 공포한 칙령이다. 신교도에게는 제한적인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고, 파리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공동 예배가 가능해졌다. 프랑스 전역을 피로 물들인 신교와 구교 간의 위그노 전쟁을 끝내는 계기가 되었다.


종교 개혁 이후 성장한 프랑스의 칼뱅주의 신교도인 위그노는 로마가톨릭을 국교로 삼고 있던 프랑스 왕정에 의해 계속 탄압받아 왔다.

16세기 말 프랑스는 신교와 구교 양파의 종교적 대립으로 국내는 분열되었고, 혼란이 극도에 달하였다. 구교와 신교 간의 갈등으로 전개된 위그노 전쟁은 이후 30여 년 동안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1589년 앙리 3세가 암살당하자 위그노 전쟁은 왕위 계승전의 양상을 띠고 국제적 전쟁으로까지 이어졌다.

 

앙리 3세의 뒤를 이어 앙리 4세가 즉위함으로써 프랑스는 부르봉 왕조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앙리 4세는 가톨릭교로 세례를 받았지만, 어머니의 영향으로 프로테스탄트로 성장하였다.

앙리 4세는 이 혼란한 프랑스의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직접 신교에서 구교로 개종하고, 1598년 4월 13일 낭트에서 신교도(위그노)에게 조건부로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칙령을 선포하였다. 이 칙령은 신교파인 위그노에게 제한된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면서 역 30년간 지속된 위그노 전쟁(1562∼1598)을 종식시켰다.

 

따라서 이 칙령은 일찍이 프랑수아 1세와 앙리 3세에 의하여 규정된 ‘구교 이외의 이단은 엄벌에 처하며, 이의 밀고자는 벌금 또는 몰수 재산의 1/4을 양여한다’ 등의 조항을 삭제시켰다.

결국 국민에게 신앙의 자유를 부여한다는 취지에서 공포되었으나, 여전히 구교를 국교로 규정한 실정이어서 이 칙령 이후에도 구교도는 신교도에 비해서 훨씬 유리한 조건이 부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측은 계속 불만을 드러냈다.

 

그로부터 약 1세기가 지난 후 절대 군주인 루이 14세는 로마가톨릭만을 국교로 인정함으로써 절대 왕정에 대한 교황청의 지원을 받고자 하였고, 1685년 10월 18일 낭트 칙령의 모든 조항을 폐지하였다. 이로써 신교도는 그동안 누려온 모든 종교적 ·시민적 자유를 박탈당하였고, 크게 동요하였다.

 

결국 프랑스 내에 살던 신교도 약 100만 명 중 약 40만 명이 영국, 네덜란드, 프로이센, 북아메리카 등지로 이주하여 새로운 지역에 정착하였다. 신교도는 대부분 근면한 상인 ·기사 ·공예인 ·군인 등으로, 경제권을 쥐고 있던 신교도들이 빠져나간 프랑스 경제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이는 프랑스 혁명의 한 원인이 되었다.

확인문제

프랑스에서 약 30년 동안 지속된 신·구교 간의 위그노 전쟁을 종식 시킨 계기가 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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