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겸의 난(1126)

이자겸 세력 확대에 위협을 느낀 인종이 이자겸을 제거하려 하자, 이자겸이 난을 일으켜 결국 인종은 이자겸의 난을 진압하였지만, 왕실의 권위가 떨어지고 귀족 사회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고려의 지배층인 문벌 귀족은 장기간 특권을 누리면서 12세기 이후 점차 보수화되었다. 이들은 왕권을 견제하면서 과거와 음서를 통해 관직을 독점하고 정치 권력을 독점하였으며,  전시과나 공음전 등의 특권적 경제 기반 위에 토지의 개간이나 겸병 등으로 대토지를 소유하는 등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확대해 나갔다. 또한 왕실과 혼인관계를 거듭 맺음으로써 그들의 권세와 부귀는 더욱 강대해지고 번성해 갔다. 


문벌 귀족 가운데 경원 이씨(인주 이씨) 집안은 왕실과의 거듭된 혼인 관계를 맺으며 대표적인 문벌 귀족으로 성장하였다. 그들은 문종 이후 7대 80여 년 동안 왕실과 중복되는 혼인 관계를 맺어 후비·귀빈을 거의 독점적으로 들여보내 왕자·왕녀가 거의 그들의 외손이었다. 경원 이씨 가문은 이자겸 때에 와서 권력의 절정기를 맞았다.


예종의 왕비 문경왕후는 이자겸의 딸이며 인종의 어머니였다. 이에 이자겸은 외손자인 인종이 왕위에 오르는 데 큰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두 딸도 인종과 혼인시킴으로써 최고의 권력자로 행세하였다. 이자겸의 위세는 점점 극에 달하여 그의 거처를 의친궁이라 부르게 하였고, 자신의 생일을 인수절이라 칭하기까지 하였다. 정부의 요직은 그의 일족과 추종자로 채워졌다.


이자겸의 횡포에 위협을 느낀 인종은 측근을 동원하여 이자겸을 제거하려 하였다. 하지만 오히려 이를 눈치챈 이자겸이 척준경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궁궐(연경궁)은 모두 불탔으며, 결국 왕권을 지키려던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고, 인종이 위기에 몰렸다(이자겸의 난, 1126). 이자겸은 인종을 감금하고 스스로 국왕이 되려고 하였다. 


이들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자, 왕은 이자겸의 반대파와 손을 잡고 내의군기소감 최사전과 대책을 의논한 결과 이자겸 일파인 척준경을 끌어들여 병권을 확보한다면 이자겸을 쉽게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최사전은 척준경에게 이자겸은 신의가 없다며 충의로써 공을 세울 것을 권하였다. 또한 왕은 척준경에게 교서를 내려 당부하였다.


척준경은 마침내 계책을 결정하고 거사를 자청하였으며, 무장을 갖추고 궁궐로 들어가 왕을 호위하고, 활을 쏘아대는 이자겸의 무리를 피해 나왔다. 왕은 군기감에서 호위를 엄중히 하고, 척준경은 이자겸과 그 무리들을 처단하거나 체포하였으며, 이튿날 이자겸 일파는 각 지역으로 유배되었고, 이자겸의 딸인 두 왕비도 폐위되었다. 척준경과 이수, 김향, 최사전은 각기 공신호와 높은 관작을 받았다.

 

이자겸은 그해에 영광의 유배지에서 죽었고, 척준경도 그가 세운 공을 믿고 날뛰다가 정지상의 탄핵을 받아 유배지에서 죽었다. 경원 이씨의 외척 세력은 이로써 몰락하고 왕정이 복고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국왕의 권위가 떨어졌으며, 문벌 귀족 사회가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출처 : 직접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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